저자소개
호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성중학을 다니며 만난 홍명희, 문일평과 함께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메이지[明治]학원에 중학3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였다. 1910년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7월 중매로 백혜순(白惠順)을 만나 혼인하였다. 1913년에는 세계여행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14년 다시 오산학교에 복직하였다. 그해 재차 세계여행을 위해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단념하고 오산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하였다. 1918년 7월에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고 이 당시 결핵으로 건강이 나빠졌으나 여의사 허영숙(許英肅)의 도움으로 건강의 회복하였고 두사람은 애정관계로 발전하였다.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8년 허영숙과 베이징을 여행하고 백혜순과 이혼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건너갔으며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민족독립운동에 공감하고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8·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 《원효대사》 《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