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좌평(佐平) 성충(成忠)

좌평(佐平) 성충(成忠)

저자
김동인
출판사
디앤피니티
출판일
2013-06-06
등록일
2020-12-02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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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봄답지 않은 암담한 봄날이었다. 절기로는 봄날이 틀림없지만 백성의 기분에는 봄답지 않은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백제 의자왕 16년 춘삼월. 백성들의 근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국왕의 방탕과 국력의 쇠약에 겸하여 이 백제의 쇠퇴를 호시탐탐 노리는 신라의 태도가 그들 근심의 근원이었다. 지금의 왕- 선왕인 무왕(武王)의 아드님으로서 지극히도 담략과 패기가 있는 분이어서 그 등극 초에는 백제의 창생이 그야말로 이 명군의 앞에 삼국 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지리라고 까지 믿었던 바였다. 그러나 그 업적이 십년이 넘으면서부터는 왕은 이제는 안심을 한 탓인지 차차 안일에 빠지게 되었다. 삼천 후궁을 데리고 매일 큰 연회를 열고 혹은 사냥을 하면서 아예 국사는 돌보지를 않았다. 인심은 흉흉하고 암담하지만 그래도 시절은 봄이라고 복사꽃 살구꽃이 민가의 울 너머서 찬란히 빛을 자랑하고 있다. 그 꽃들을 음산한 낯으로 바라보면서 말고삐를 채며 가는 사람-그는 백제의 재상 성충이었다. 그는 지금 주색에 빠진 왕께 마지막 충간(忠諫)을 해보려고 입궐하는 길이었다. 힘써 아뢰어도 듣지 않으면 이 늙은 목숨까지 내어 던지려 이미 가족과도 작별한 처지였다. 적적한 눈을 들어 꽃빛을 보는 재상의 눈에는 엷은 눈물의 흔적까지 있었다. ""상감마마"" 좌우에 궁녀를 늘이고 연락(宴樂)에 잠겨 있는 왕의 어전에 성충은 꿇어 엎드렸다. ""누구 좌평에게 술을 따라라"" 왕의 낯에는 벌써 귀찮다는 빛이 역력했다. ""어 취해, 누구 무릎 좀 가져오너라"" 취해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이 그 자리에 누울 준비를 했다. ""노부의 무릎, 더럽고 뼈투성이지만 충성의 무릎이옵니다. 받으시옵소서"" 성충은 궁녀를 쫓고 대신 자신의 무릎을 왕의 머리 아래로 디밀었다. 한 각, 또 한 각. 단연히 꿇어앉은 늙은 재상의 머리에는 만 가지 생각이 왕래하였다. 온조 대왕 건국이래 칠 백년에 가까운 백제가 이 왕의 초년만치 혁혁하였던 때가 언제 있었더냐. 그러던 왕의 오늘의 이 난정(亂政)은 어떠하냐.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국왕은 주색에만 잠겨 있으니, 늙은 이 몸 언제 죽더라도 아깝지 않은 몸, 나라와 임군을 위하여 바치자- 온 몸이 저려 오고 있었지만, 왕은 자는 듯 가만있기만 했다. 성충은 눈물이 핑 돌았다. 맺혔던 눈물이 왕의 이마에 떨어지는 줄도 성충은 몰랐다. ""엑, 더러워! 이 비즙(鼻汁)을!"" 순간 임금이 소리치며 일어났다. 그리곤 세수할 물을 가져오라고 명령이었다. ""상감마마! 비즙이 아니오라 소신의 눈물이옵니다"" 성충이 아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최후의 길 밖에 없다고 성충은 생각했다. ""상감! 정신을 차립쇼. 이 사직이 위태롭지 않습니까? 술을 삼갑쇼, 계집을 삼갑쇼, 신라의 군비를 경계할 줄 아십쇼. 충신의 충언을 쓰다 하시면 천추에 한을 남기리다"" 눈물만 비오듯 하였다. 성충은 드디어 왕옥(王獄)에 갇힌 바 되었다. 용안에 콧물을 떨어뜨렸다는 것이 첫째 죄목이요, 왕령을 거슬렀다는 것이 두 번째 죄목이었다. 신하의 도리로 왕을 호령하였다는 것이 제3의 죄목이요, 태평성대에 민심을 소란케 한다는 것이 네 번째 죄목이었다. 이후에도 왕은 더욱 더 주색을 즐겼다. 옥에 갇힌 성충. 늙은 몸을 옥에서 굴리면서도 국사는 잊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킨 성충은 겨우 부비적부비적 하여 북향으로 돌아앉았다. 간신히 엎드려 절을 한 뒤에 한쪽 팔을 써서 자기의 속옷을 벗었다. 그 속옷을 무릎 앞에 펴놓은 뒤, 손가락을 입에 넣어 힘껏 깨물었다.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로 마지막 상소문을 썼다. -지금 시세를 살피옵건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이 있을 줄 믿사옵니다. 우리 나라의 지세를 살피옵건대 상류에 진(陣)하여서 적을 막은 연후에야 능히 국토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오며 적병이 강역을 침노한다 할지라도 육로로는 탄현을 굳게 지키옵고 수로로는 기벌포를 힘써 막으면 적병이 능히 경도를 침범치 못할 줄 아오니 전하 비록 유연(遊宴)에서 떠나실 여가가 없으시더라도 장군 계백에게 하명하와 이 두 길만이라도 미리 방비하여 두오면 소신 죽을지라도 능히 눈을 감을 수 있겠사옵니다. 차차 정신이 혼미하와 더 아뢰지 못하옵니다. 전하 만수무강하옵소서. 소신은 황천에서 전하와 백제의 만만세를 축수하오리다. 피가 마르면 다시 손을 깨물고 깨물고 하여 간신히 썼다. 그 뒤 또 한 장 계백 장군에게도 쓰려고 하였으나 더 기운이 없었다. 옥사정을 불러 상소문을 전하고 성충은 그 자리에 고요히 엎드렸다. 성충의 상소문이 들어온 때는 왕이 여전히 후원에서 잔치를 할 때였다. 왕은 상소문을 받아보고 가슴이 서늘했다. 그러나 이내 더러운 물건이나 되듯이 휙 내던졌다. ""이게 뭐냐. 더럽게, 멀리 집어치워 버려라"" 이날 장군청에 입직해 있던 계백 장군은 연회장에서 새어 나온 이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약관(弱冠) 시대 때부터 함께 나라를 지켜오던 성충을 옥에 보내고 항상 마음을 쓰던 이 노장군은 소문을 들은 즉시 후원 근처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액을 불러 성충의 혈서를 구해 오게 하였다. 장군은 그것을 읽었다. 피 글씨를 읽어내려 가는 장군의 주름 잡힌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 좌평, 계백이 살아 있는 동안이야 어찌 귀공의 뜻을 저버리리까"" 임종키 전에 빨리 가서 마지막 손이라도 잡아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계백은 왕옥을 향해 걸음을 빨리 하였다. ""옥문을 열어라"" 옥사정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서 보매 성충은 고요히 엎드려 있었다. 계백은 잠시 기다렸다. 거의 한 각이 지나도 성충은 움직이질 않았다. 의심이 덜컥 난 계백은 그제서야 성충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차디찬 주검. 갑자기 옥안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옥사정이 놀라서 달려와 보매 노장군 계백이 성충의 시체를 쓸어안고 발을 구르며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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